2017년 힙합씬 최고의 루키는 영비(양홍원)였다. 물론 나플라나 저스디스도 있겠으나 대중들에게 보다 친숙한, '카메라 힙합'으로 범위를 한정해보면 그렇다. 영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의 유투브 영상을 보더라도 댓글이 찬반으로 나뉘어져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뭐, 학교 폭력의 주범인 영비는 TV 출연을 삼가야한다는 쪽이 조금 더 득세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만약 영비가 과거에 학교 폭력의 주범이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는 무대에서 내려와야만 할까? 답이 당연한 질문같지만 내 생각에는 그리 간단한 문제만은 아니다. 지금 나는 영비를 옹호할 의도도 없을 뿐더러 그러고 싶지도 않지만, 영비가 음악을 그만 두어야만한다는 의견에는 쉽게 동의할 수가 없다.
영비가 학교 폭력의 가해자였다면 분명 그로인해 지금까지도 상처를 안고있는 피해자가 있을 것이다. 가슴아픈 일이다. 대다수 네티즌의 주장 또한, 피해자가 영비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느낄 고통을 생각해서 그가 활동을 자제해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영비는 영향력있는 음악가가 되었고, 어쨌든 그의 음악으로 좋은 영향을 받는 사람들 또한 있을 것이다.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개인적으로 영비의 음악은 '폭력성'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딕션이나 톤에서 느껴지는 폭력성에서 힙합 음악 본연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폭력의 경험이 현재 영비가 음악을 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산이 되었으며, 이는 그동안 유명세를 얻었던 많은 미국의 래퍼들의 사례로 보아도 전혀 새로울게 아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영비의 음악이 대중에게 확실한 어필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영비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일까. 다른 예를 들어서 생각해보자.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인데, 세계 3대 기타리스트로 불리는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의 대표곡 중에는 Layla라는 곡이 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사실 에릭 클랩튼이 당시 비틀즈의 멤버이자 자신의 절친한 친구였던 조지 해리슨의 아내, 패티보이드를 사모하여 쓴 곡이다. 친구의 아내를 흠모한다니, 이보다 더 추악한 비도덕이 어디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못들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들어본 사람은 없다는 명곡이다. 또한, 이 Layla라는 곡은 전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을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뜻도 모르고 노래를 흥얼거리던, 그의 콘서트창에서 떼창을 하던간에 말이다. Layla를 들으며 사람들이 느낀 행복은, 부도덕한 배경에서 탄생한 곡을 들으며 느낀 질이 좋지 않은 행복이었을까. 여기서 공리주의같은 철학적 사상까지 나아가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을 쉽사리 '잘못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본다.
다시 영비로 돌아가보자. 내가 영비의 음악을 들으며 행복감을 느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나쁜 일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시금 말하지만 나는 지금 영비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며 학교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과거에 그가 폭력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 그의 음악이 가진 특유의 색채는 없었으리라 확신한다. 분명 민감한 얘기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 역사적인 창작물들이 모두 흠결없는 도덕적 배경에서 탄생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위법한 행위를 저질렀다면 법에 따라 심판을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순수하게 도덕적 잣대를 가지고 판단해야 하는 행위, 예컨대 에릭 클랩튼이 패티보이드를 흠모했던 마음 그 자체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즉, '예술가의 도덕적인 타락을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가'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에릭 클랩튼이 패티보이드를 흠모하지 않았다면, Layla라는 명곡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영비의 내면에 그 폭력적인 색채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유명세를 얻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그로인해 상처를 받는 사람에게는 가슴아픈 일일테지만, 그렇게 예술이 탄생하기도 한다. 예술 세계의 오래된 딜레마인 셈이다. 우리가 뛰어난 창작물의 탄생을 위해서 예술가의 도덕적 타락을 어느 정도 눈감아 주는 것이 온당한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대중은 창작물이 뛰어날수록 관용의 범위를 넓혀준다는 것이다. 에릭 클랩튼까지 갈 필요도 없이 전인권이 그랬고 이병헌이 그랬다. 그들을 비난하기에는 그들의 창작물이 주는 행복이 너무 크기에 우리는 눈을 감는다. 물론, 영비를 그들과 놓고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영비로 인해 불거진 논란은 '예술인의 도덕적 타락과 대중의 관용'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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